혼인은 과거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족을 이루고, 또 그 가족 각각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이루는 것이기에 국가에서는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순 혼인이 아닌 재혼, 즉 재가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그 방법이나 인식의 차이가 있으므로 과거부터 짚어보며 현대 사회의 혼인에 대해서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
고려시대는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개방적인 혼인 문화를 지닌 시기였다. 특히 여성의 재혼, 즉 재가혼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크지 않았으며, 법률적으로도 이를 금지하거나 강하게 규제하지 않았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은 국가였고, 불교의 교리는 개인의 욕망이나 삶의 고통을 인정하면서 현실적인 삶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배경은 여성의 혼인과 재혼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실제로 사망이나 이혼 후 여성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귀족층 여성의 경우도 정치적 동맹을 위해 재혼하는 사례가 있었고, 평민 여성들은 생활을 위해 자연스럽게 재혼을 택했다. 삼국유사나 고려사 등의 사료에는 재혼한 여성들의 기록이 종종 등장하며, 이를 통해 재가가 사회적으로 크게 비난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조선시대는 고려와 달리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으면서 여성의 재가혼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교는 가부장제와 여성의 정절을 중시하는 이념 체계였고, 이는 여성의 일생을 한 남편에 대한 정절을 규정짓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풍속이 일부 남아 있었기에 재가가 전면적으로 금지되지는 않았으나, 세종대 이후부터는 점차 강력한 억제 정책이 시행되었다. 특히 경국대전이나 속대전 등 법전에는 재가한 여성이 다른 관직자나 양반 남성과 결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재가녀의 자식이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조항도 있었다. 이는 단지 여성을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여성의 후손과 가문 전체에까지 불이익을 주는 사회적 구조로 이어졌다.
이러한 재가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조선 후기까지도 이어졌으며, 여성의 삶을 극도로 억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은 남편이 사망해도 재혼하지 않고 시부모를 봉양하며 살기를 강요받았고, 이를 열녀라고 부르며 기념했다. 심지어 자결하거나 순장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러한 극단적인 행위는 여성의 정절을 당연하게 여기고 결과적으로는 여성의 평생 억제하는 짐이 되었다. 열녀문이나 열녀비는 이러한 문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었으며, 지방 관청과 양반 가문에서는 열녀를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포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남성의 가문에 속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남편이 죽더라도 가문을 떠나지 않고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반면 남성의 경우는 아내가 죽은 후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 비난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회 전반에서 재가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현실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여성들이 재가를 택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러한 재가는 특히 하층민이나 평민 계층에서 더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을 위험이 항상 존재했다. 재가녀의 자식은 중인이나 상민 신분일 경우에도 승진과 교육, 혼인 등에 있어 제약을 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재혼을 은폐하거나, 비공식적으로 혼인 생활을 유지하는 사례도 많았다. 실제 기록에서 발견되는 사례들을 보면, 여성 본인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국가시험 응시나 관직 진출에서 배제된 예가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약은 단지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유동성과 계층 이동의 가능성마저 차단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론적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재가혼에 대한 태도는 국가 이념과 사회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여성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불교적 가치관과 유연한 사회 분위기 덕분에 재혼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지만, 조선은 성리학적 가치관 아래 여성을 가문의 소유물로 규정하며 정절을 강요하며 재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선의 여성들은 단지 한 개인이 아닌 가족과 가문, 더 나아가 국가적으로 정절을 요구받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러한 이중적 잣대는 여성의 인권을 억압하고, 사회 전반의 불평등 구조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재가혼을 통해 재기를 꿈꾸거나, 생존을 도모했던 여성들의 삶은 끊임없이 제약 속에서 이어졌고, 이는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하게 돌아볼 점이다. 고려와 조선의 재가혼 문제는 단순히 결혼제도의 변화를 넘어서, 한 사회가 여성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고 통제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지표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중시되면서 재혼에 대한 인식도 과거와 비교해 크게 변화하였다.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재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혼과 재혼이 하나의 삶의 선택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여성의 재혼에 대해서도 조선시대와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다양한 가족 형태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유연한 혼인 관습과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조선시대처럼 제도적이고 윤리적 제약으로 억압받던 여성의 삶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다만 여전히 일부 보수적 시각이나 가족 내 갈등, 자녀 양육 등의 문제로 인해 재혼 가정이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는 개인의 행복과 자율적인 선택을 우선하는 분위기 속에서 재혼 역시 더 이상 숨겨야 할 일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삶의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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