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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의 해양 교역과 해상 네트워크

by chyukochi 2025. 4. 21.

대외 무역은 시대를 불문하고 국가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현대사회 역시 그러한데 이러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고려시대 대외 교역에 있어 굉장히 많은 노력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고려라는 이름을 국제 사회에 알린 것도 중요한 터닝 포인트이다. 

고려는 대외 교역에 있어 매우 개방적이고 활발한 정책을 펼친 나라였다. 대륙과 해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에 고려는 육상뿐 아니라 해상을 통한 국제 교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특히 11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고려는 송나라, 거란, 여진과 일본, 심지어 이슬람 상인들과도 교류하며 독자적인 해상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러한 교역 활동은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주었고, 나아가 다양한 문물과 여러 가지 사상이 유입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가 국제 무역에서 중요한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 안정성이 바탕이 되었던 것과 함께 항만 시설의 설비, 다양한 무역 정책과 해상 방어력 등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은 벽란도였다. 벽란도는 현재의 황해도 지역에 있었으며, 고려 시대 해상 교역의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다. 이곳에는 각국의 상인이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고려 정부는 외국 상인들을 위한 숙소를 제공하거나 시장의 관리, 세관 등의 시설을 정비해 놓았다. 송나라 상인들이 도자기나 비단, 약재, 책 등을 가지고 들어오면 고려에서는 인삼, 모피, 금이나 은, 종이 등을 내보냈다. 특히 고려의 금속 활자 인쇄 기술이나 청자 제작 기술 등은 외국 상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고, 이는 고려 제품의 품질과 예술성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 벽란도는 단순한 무역항이 아니라 여러 문화와 사상의 교류지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고려와 아라비아 교류도 눈에 띈다. 당시 이슬람 상인들은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동아시아까지 진출했고, 고려는 그들의 중요한 목적지 중 하나였다. 고려의 사서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아바스 왕조 혹은 이슬람 세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슬람 상인들은 향신료, 보석류 등을 고려에 가져왔고, 반대로 고려의 인삼과 도자기, 종이 등을 구매해 서역으로 실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아라비아 유리잔이나 이슬람 도자기가 고려 왕실 또는 상류층 사이에서 수집품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이처럼 두 국가는 단순한 물자 교환을 넘어서 문화적 취향의 공유까지 이루어지는 관계를 형성했다.

이러한 해상 네트워크가 가능했던 데에는 고려의 선진적인 해양 기술과 정책적 뒷받침이 있었다. 고려는 선박 기술이 발달했으며, 항해술 또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항해 시 별자리나 조류를 활용한 기술은 고려 상인들이 먼 해역까지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아울러 국가 차원에서는 교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각종 조세 제도, 외국 상인에 대한 규정, 그리고 외교 사절단 파견 등을 통해 교역 환경을 안정적으로 조성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해상 활동이 위축되긴 했지만, 한동안 유지된 해양 패권은 고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의 해상 교역은 단순한 경제적 활동을 넘어 문화적 교류의 장이기도 했다. 중국과 이슬람 세계, 일본 등으로부터 들어온 다양한 사상과 기술, 다양한 문물은 고려 사회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불교 경전은 송나라에서 대량 수입되었고, 그 내용은 고려 불교의 사상적 깊이를 더했다. 의약, 역법, 천문 등에서도 외래 지식의 도입은 고려의 학문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또, 아라비아 상인들로부터 전해진 천문 지식이나 지도 제작 방식은 고려 후기 과학기술 발전의 토대가 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교역은 물품의 이동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문화의 이동이며, 고려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 문명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소통한 나라였다.

고려의 해양 교역이 비교적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면, 조선시대의 해양 교역은 보다 제한적이고 통제 중심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국정의 근간으로 삼으면서 사대교린 정책을 펼쳤고, 해양보다는 대륙과의 외교 및 교역에 더 집중했다. 특히 왜구와 해적의 위협, 해상 질서 유지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민간의 자율적인 교역을 억제한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조선의 교역은 명·청과의 조공무역, 일본과의 부산포 정도의 제한적 교류, 그리고 류큐나 동남아와의 간헐적 교류로 축소되었다. 반면 고려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도 민간 상인의 활발한 활동과 국가의 적극적 지원이 공존하며 해양을 국가 성장의 주요 축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러한 차이는 두 왕조가 바다를 대하는 시각의 차이이자, 대외 인식의 반영이며, 결국은 국가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고려의 해양 교역과 해상 네트워크는 단순한 상업 활동의 범주를 넘어 국가 발전의 핵심 요소였다. 벽란도와 같은 항만 도시는 단순한 물류 중심지가 아니라 국제 교류의 장이었으며, 이곳에서 형성된 상업과 문화의 접점은 고려의 자주성과 개방성을 보여준다. 현재까지도 고려청자나 금속 활자 등이 서구 박물관에 소장된 것은 고려의 해상 네트워크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말해준다. 이러한 해상 교역의 역사는 오늘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려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세계를 향해 열린 나라였으며,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고려의 해양 교역과 해상 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