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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 기술자의 종류와 역할

by chyukochi 2025. 4. 15.

조선시대는 유교적 질서와 왕권 중심의 정치 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가 운영되었지만, 그 기초를 튼튼히 지탱한 것은 다름 아닌 각종 기술자들이었다. 그것은 지금 현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느 사회, 어느 국가든 기초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기술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중앙과 지방에 걸쳐 다양한 전문 기술 인력을 두어 국가의 각종 건축, 공업, 방어, 제조, 인쇄 등의 분야를 담당하게 했으며, 이들은 ‘匠人(장인)’ 또는 ‘工匠(공장)’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조선 초부터 국가 주도의 기술자 육성과 관리를 위한 제도가 마련되었으며, 기술자의 역할은 단순한 수공업 수준을 넘어 국책 사업, 군사, 외교 등 국가 전체의 실질적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은 관청에 소속되어 일정한 업무를 수행하거나, 민간에서 수공업 종사자로 활동하면서 국가사업을 위해 차출되기도 하였다.

1. 목수
건축과 관련된 기술자 중 대표적인 부류는 목수였다. 이들은 궁궐, 사찰, 성곽, 누각 등 주요 건축물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대목장(大木匠)’과 ‘소목장(小木匠)’으로 나뉘었다. 대목장은 구조 설계와 책임감독을 맡았고, 소목장은 세부 작업을 주로 담당했다. 건축에 필요한 석재를 다루는 ‘석수匠(석수장)’ 역시 중요했으며, 돌계단, 담장, 무덤 등을 조성할 때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건축 기술자들은 단순한 기능공을 넘어서 예술성과 구조 공학적 지식을 겸비해야 했으며, 그 실력은 대를 이어 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목수장이 설계 도면을 그리고, 공정을 분리해 작업을 분담하는 체계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기술적 숙련도는 더욱 높아졌다.

2. 화약장/ 화포장/ 기계장/ 궁시장 

무기 제작 및 군수 물자와 관련된 기술자도 조선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였다. 조선은 왜구, 여진족, 그리고 후에 명이나 청과의 외교
전쟁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군수 기술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화약과 화포의 제조를 담당한 기술자는 ‘화약匠(화약장)’ 및 ‘화포匠(화포장)’이라 불렸고, 이들은 병조 또는 군사 관련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특히 세종대왕 때 장영실과 같은 인물들이 주도한 천문기기 및 무기 제조는 국가 기술력의 정점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시기에는 ‘기계匠(기계장)’이라는 개념도 등장하였다. 이들은 화포 외에도 시계, 천문 관측 기구, 농기구 등 다양한 정밀 기계 장치를 제작하였으며, 당시 조선의 기술 수준이 동아시아에서도 높은 편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 ‘궁시匠(궁시장)’ 역시 활 중심 무기체계를 유지한 조선에 있어 중요한 존재였다.

 

조선시대 기술자의 종류와 역할



3. 지장/ 제본장/ 주자장
인쇄와 서적 제작을 담당한 기술자들 역시 조선의 학문과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은 유교 국가로서 경전, 실록, 서적 등의 간행을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활자 주조나 종이 제작, 제본 기술이 체계적으로 발달했다. 활자를 주조하는 ‘주자匠(주자장)’은 금속 활자나 목활자를 정밀하게 제작하는 전문가로, 이들의 기술력에 따라 서적의 질과 간행 속도가 결정되었다. 또한 종이를 제조하는 ‘지匠(지장)’은 닥나무, 백피 등을 활용하여 한지를 만들었고, 제본을 담당한 ‘제본匠(제본장)’은 각종 책을  엮는 과정을 수행했다. 이들 기술자는 교서관, 예문관, 간경도감 등 인쇄를 담당한 관청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정기 간행 사업뿐 아니라 비문이나 족보, 고지도 제작 등에도 관여하였다. 조선이 금속 활자 인쇄술을 발전시켜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본을 간행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그 기술과 실용성 면에서는 독보적인 수준을 유지하였다.

4. 침장/ 도공/ 세장/ 칠장 외
마지막으로, 생활과 밀접한 공예 및 일상용품 제조 기술자들도 조선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계층이었다. 옷을 짓는 ‘침匠(침장)’, 그릇을 만드는 ‘도匠(도장, 도공)’, 금속 세공을 담당한 ‘세匠(세장)’, 칠기와 옻칠을 전문으로 한 ‘칠匠(칠장)’ 등 다양한 기술자들이 존재했다. 특히 백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 도자기 기술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분청사기, 청화백자 등은 귀족과 왕실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이외에도 가죽을 다루는 ‘혁匠(혁장)’, 부채를 만드는 ‘선匠(선장)’, 옷감과 실을 다루는 직물 기술자들도 존재했으며, 이들의 기술은 시장 경제와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민간 공예 기술자들의 활동 영역은 더욱 넓어졌고, 일부 장인은 왕실 납품을 통해 명성을 얻고 후손에게 기술을 계승했다.

결론적으로 조선시대의 기술자들은 단순히 도구나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자임을 넘어, 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기반을 이루는 핵심적 존재였다. 그들은 중앙의 기술 관청이나 지방의 관아에 소속되어 전문적인 작업을 수행했으며, 경우에 따라 정기적인 국가 행사나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해 큰 공헌을 하였다. 기술은 혈통, 지위와 관계없이 실력에 따라 존중받을 수 있는 드문 분야였기에, 일부 장인들은 관직에 오르거나 세습된 장인 집안으로서 높은 명망을 유지하기도 했다. 조선의 기술자 사회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도 실용과 전문성을 중시했던 특징을 보여주며,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전승되어 한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장인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또한 오늘날의 기술자들은 과거 조선시대 기술자들과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지닌다. 공통점은 두 시기 모두 기술자가 사회의 실질적인 기반을 이루며, 국가의 발전과 안전,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기술자들이 목재, 금속, 도자기, 활자 등의 물리적 재료를 다루며 오랜 경험과 전통 기술을 축적해 왔다면, 현대 기술자들은 전자, 컴퓨터, 바이오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해 더욱 빠르고 정교한 방식으로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 기술자가 가문이나 스승을 통해 기술을 전수받았다면, 현대의 기술자들은 대학교, 직업교육기관, 연구소, 기업 등을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교육을 받는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기술자들이 사회적으로 기능인으로서 제한된 신분과 역할을 가졌던 반면, 현대의 기술자들은 엔지니어, 개발자, 설계자, 연구원 등 다양한 전문 직종으로 분화되며, 기술력과 창의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도 크게 인정받고 있다. 이는 기술의 본질이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되, 그 적용 방식과 사회적 위치가 끊임없이 진화해 왔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