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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시대의 장례업

by chyukochi 2025. 4. 14.

조선시대는 유교 국가인 만큼 당연히 장례에 대해 엄격하고 또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속한 계층에 따라 조금씩 다른 점도 분명히 있으며 현재의 장례 문화와 공통점과 다른점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조선시대 장례문화의 이상과 현실
조선시대는 유교적 이념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기로, 장례 또한 체계적인 의례서와 유교 경전의 규범에 따라 행해졌다. 사대부가의 장례는 삼일장 혹은 오일장으로 정제되어 있었고, 복장과 절차, 곡의 방식까지 규범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장례는 현실에서는 극히 일부분에만 해당되었으며, 실제 대다수 백성의 장례는 물리적, 경제적 한계로 인해 축소되거나 민속신앙이 가미된 형태로 치러졌다. 특히 상을 치를 능력이 없는 빈민층은 장례조차 생략하거나 공동으로 간소화한 형태로 진행했고, 자연장에 가까운 형태도 존재했다. 이 같은 현상은 엄격한 예법과 현장의 실제 풍습이 괴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2. 상여꾼과 장례집단
조선 후기부터 장례 전문 인력이 등장하면서 일종의 ‘장례업’이 비공식적으로 형성되었다. 상여꾼, 지게꾼, 곡꾼(곡을 대신해주는 여성), 무당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들은 종종 상여를 공동 소유하거나 상여집을 운영하며 지역 공동체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정해진 직업으로 분류되진 않았으나, 일종의 기능 집단으로 인식되었고, 특히 상여를 운반하거나 노제를 치를 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들의 활동은 기록으로는 잘 남지 않았으나, 민화, 장례 설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장례는 단순한 육체 운반 이상의 의례였고, 이들의 전문성은 의외로 깊은 상징성과 기술을 동반했다.

 

조선시대의 장례업



3. 죽음에 대한 기억 방식
조선의 상여는 단순한 운반 수단이 아니라 지역 사회의 예술성과 기억이 반영된 물건이었다. 목공예, 채색, 문양, 심지어는 작은 장식물까지 섬세하게 구성되었으며, 상여 위에 놓인 용머리나 봉황 장식 등은 망자의 신분이나 유족의 사회적 위상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또한 장례 중간에 열리는 '노제(路祭)'는 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도중에 멈춰 제물을 바치고, 곡을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장례 행위라기보다는 개인의 죽음을 공동체가 함께 인지하고 수용하는 ‘사회적 의례’로 기능했다. 따라서 장례는 사적 사건이면서도 공동체적 차원의 행위로 확장되었다.

4. 곡꾼과 여성의 역할
유교적 장례문화에서는 남성이 주로 많은 참여를 하고 주체가 되었지만 실제 장례의 현장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막중했다. 대표적으로 곡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곡 꾼’은 대부분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유족의 감정을 공공연히 표현해 주는 역할을 했다. 유교 이념은 지나친 곡을 억제했지만, 백성들의 정서 속에서는 오히려 곡을 통해 슬픔을 토로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곡 꾼은 곡의 형식과 리듬을 운용했고, 어떤 경우에는 망자의 생전 행적이나 사연을 읊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기도 했다. 또한 여인들은 상복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하며, 제례 공간을 만드는 등 실질적 의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장례는 여성의 손을 떠나지 않고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문화를 무조건 기록하고 보존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시대의 장례 문화 또한 분명 현대의 장례 문화에서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과한 의식이나 불필요한 절차는 과감히 버리되, 기억하고 보존해야 될 것은 반영하고 기록하면서 발달 시키는 것이 문화를 보존하면서도 배우는 길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