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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일제시대 조선의 민간신앙

by chyukochi 2025. 4. 15.

일제강점기(1910~1945)는 조선 민족에게 정치적 식민 지배와 더불어 문화적 탄압이 동반된 시기였다. 이 시기 조선 사회는 서구 문명과 근대화의 영향, 일본의 여러 가지 동화정책, 전통 가치 체계의 해체가 복합적으로 얽히며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그 가운데 민간신앙은 단지 종교적 신념에 머무르지 않고, 민족 정체성과 공동체의 심리적 지주로 기능하였다. 유교, 불교, 기독교 같은 제도 종교와는 달리, 민간신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상생활에 깊숙이 스며든 무속이나 도교적 문화, 조상 숭배, 풍수지리, 샤머니즘적 요소들을 포괄한다. 일제는 이를 '미신'이라 치부하고 억압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조선 민중에게 민간신앙은 생존과 저항, 치유와 소통의 수단으로서 더욱 절실하게 작동하였다.

당시 민간신앙의 핵심은 무속이었다. 무속은 무당이 신과 인간을 중개하며 길흉화복을 점치고 병을 치유하는 종합적 신앙 체계로, 지역마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상적 재난과 억압 속에서 무속의 역할이 더욱 확대되었다. 조선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굿을 벌이며 가족의 안녕과 조상의 영혼을 위로했고,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재앙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려 했다. 특히 무당은 여성의 사회적 억압 속에서 여성들이 감정을 표현하고 주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드문 공간이 되었다. 이 시기의 굿은 단순히 개인의 운세를 점치는 것을 넘어, 공동체의 정체성과 희망을 회복하는 집단 의례로 기능하였으며, 민중은 무속을 통해 보이지 않는 힘과의 연대를 믿고 본인들이 느끼는 현실의 힘듦을 견디려고 하였다.

 

일제시대 조선의 민간신앙



또한 일제는 자신들의 천황 숭배 체제를 조선에 강요하면서, 전통 민간신앙을 체계적으로 억압하려 했다. 대표적인 예로, 무당에 대한 단속과 ‘미신 타파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무속이나 도교적 요소가 남아있는 마을 신당, 산신제 등을 미신으로 규정하고 파괴하거나 폐쇄하였으며, 무당을 ‘사회악’으로 묘사하는 선전도 펼쳤다. 학교 교육과 관청 행정에서도 철저한 배제를 시도하였고, 심지어 굿을 올리는 가정을 비문명적으로 간주해 감시 대상에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제의 문화 동화 정책은 겉으로는 근대화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민중의 자율적 문화와 신념 체계를 해체하려는 식민적 지배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에 대응해 조선 민중은 민간신앙을 보다 은밀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유지했다. 무속 의례는 집 안이나 외딴 장소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고, 산신제나 마을에서 올리는 제사도 일제의 눈을 피해 조용히 치러졌다. 일부 무당과 신도는 굿의 명분을 건강 기원, 조상 제례로 포장하여 형식적으로는 종교 색채를 줄이면서 실질적 신앙을 지속하였다. 특히 무속은 기독교와도 혼합되어 ‘기도 굿’이나 ‘신령기도’ 같은 새로운 형태로 변주되었고, 이는 훗날 한국적 종교 형태에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된다. 또한 항일 독립운동과 연계된 무속적 신념도 존재했다. 예컨대 독립운동가나 순국선열의 영혼을 위로하고, 조국의 광복을 열망하는 행위는 민족적 저항의 정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무속은 단순한 미신이 아닌, 억압 속에서 민중이 정신적 자율성을 지키기 위한 상징적 공간이자 저항의 언어였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민간신앙을 단순히 과거의 잔재나 비과학적 행위로 치부하기보다는, 식민 지배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민족 문화의 내면적 저항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무속은 언어, 상징, 리듬, 제의 등 복합적 문화 요소를 지닌 민중 예술로 평가되며, 근대화 이전의 민중 감성과 정신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일제의 미신 타파는 당시 조선 민족의 영성과 공동체 문화를 부정하는 폭력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민간신앙은 그 자체로 조선 민중의 삶과 죽음, 생존과 소망, 저항과 화해가 녹아든 삶의 방식이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종교문화와 공동체 의례, 심리적 풍토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의 민간신앙은 억압 속에서도 이어진 문화 생존의 기록이며,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정체성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무속신앙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종교의 다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뿌리 깊게 살아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억압과 검열 속에서 민속 문화로 위축되었지만, 광복 이후 무속은 다시 공공연하게 드러나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모했다. 과거에는 공동체 중심의 집단 의례가 많았다면, 오늘날에는 개인의 운세나 진로 건강, 직업 등 실생활과 직결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일대일 상담 형태가 주를 이룬다. 특히 불확실성과 경쟁이 심화된 현대 사회에서 무속은 심리적 안정과 대안적 조언을 구하는 채널로 자리 잡았다. 이는 일제강점기의 민간신앙이 사회적 억압과 재난 속에서 치유와 위안의 역할을 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며, 무속이 단지 미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불안을 다루는 문화적, 심리적 장치임을 보여준다. 또한 오늘날 무속은 대중문화 즉 유튜브, 콘텐츠 산업과 결합해 새로운 형태로 소비되며, 한편으로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한다. 이처럼 무속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화를 겪으면서도 인간의 보편적 욕구와 감정을 담아내는 살아 있는 신앙 형태로서 계속 진화하고 있다.